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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백산"40돐특집]《장백산》창간 40돐을 맞으며 (김수영)

김수영 潮歌网 2020-09-15

대형문학지 《장백산》창간 40돐 기념나와 《장백산》


《장백산》 창간 40돐을 맞으며 


  김수영



올해 5월이면 우리말 대형문학지인 《장백산》 잡지가 창간된 지 40돐이 된다. 《장백산》의 탄생으로부터 내가 인퇴하기까지 장장 28년간 줄곧 《장백산》에 몸을 담아온 나로서는 실로 감개무량하다.

1979년 9월, 류하에서 열린 통화지구 조선족문학연구소조회의에서 남영전 조장을 비롯한 5명의 겸직편집으로 구성된 장백산편집부가 설립되였다. 당시 나는 통화시조선족중학교에서 조선어문 교원으로 일하면서 《장백산》의 편집을 겸하였다. 그리하여 나는 영광스럽게도 《장백산》의 창시자의 일원이라는 영예를 지니게 되였다. 창간 초기에 《장백산》의 앞길에는 곤난이 첩첩하고 애로가 많았지만 신생한 《장백산》은 만난을 물리치며 거침없는 항행을 시작하였다. 1980년 5월에 유서 깊은 통화에서 유사 이래 처음으로 우리말 대형문학지가 고고성을 울리며 창간되였다. 이듬해에는 2명의 전문편집을 두게 되였고 계간지로 바뀌였다. 1983년에는 내부간행물이 공개간행물로 바뀌였고 7명의 편제를 가진 편집부를 설립하였다. 그리하여 나는 84년 8월에 장백산잡지사로 전근되였고 전문편집으로 일하기 시작하였다. 1985년에 잡지사는 길림성작가협회에 소속된 성급 간행물로 승급되였고 잡지는 격월간으로 바뀌였다. 1988년에는 잡지사가 길림성민족사무위원회에 소속되였고 1990년에는 잡지사가 통화시로부터 성소재지인 장춘시로 옮겨왔다. 그때로부터 《장백산》은 아주 빠른 속도로 성장, 발전하였다. 창간 20돐과 21세기를 맞이할 때 《장백산》은 이미 조선문 간행물 중 유일한 성급 대형문학 격월간으로서 국내외 광범한 독자들의 환영을 받았고 길림성 10대 우수간행물의 하나로서 대외적으로 문화교류를 실시하는 우리 나라의 중요한 창구의 하나로 되였다. 또한 우리 나라의 100종 중점간행물에 선정되고 우리 나라 소수민족문학간행물 중의 명품으로 자리매김하였다. 

1997년 8월 나의 정년퇴직을 앞둔 어느 날, 남영전 사장님이 나에게 퇴직 후의 타산이 뭐냐고 물었을 때 나는 대뜸 “《장백산》이 수요하는 날까지 그냥 일하겠습니다”라고 대답했더니 남사장은 알겠노라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하여 나는 내가 언제 퇴직수속을 했는지도 감감 모르고 10년 동안 그냥 일하다가 내 나이 만 70이 되던 2007년에 28년간 근무해온 장백산잡지사에서 정식으로 인퇴하였다.

우리 민족의 얼을 지키고 우리 민족의 발전과 번영을 위하여 40년을 하루같이 드팀없이 분투해온 《장백산》은 내 인생을 재생시켜주고 나의 많은 꿈을 실현해준 내 삶의 보금자리였다. 장백산잡지사는 어머니마냥 나를 따뜻이 안아준 너그러운 품이였고 남영전 사장님이야말로 영영 잊을 수 없는 나의 은인이다.

《장백산》은 나에게 제2의 생명을 안겨주었다.

1984년 12월, 내가 《장백산》 편집부로 전근된 지 불과 넉달 만에 《장백산》 편집부 당지부(당시에는 한문편집부와 련합지부였음)대회에서 나의 입당신청이 만장일치로 통과되였다. 나의 입당소개인은 김택원 선생과 리여천 선생이였다. 그날의 감격을 나는 영원토록 잊을 수 없다. 내가 처음으로 입당신청서를 바친 때는 대학 3학년 때인 1958년이였고 24년의 교원사업 기간에도 수차 입당지원서를 바치기도 했지만 줄곧 정치생명을 얻지 못했는데 그런 나의 고충을 헤아린 남영전 사장의 제의로 30년 가까이 탄원해오던 숙원이 일조에 이루어진 것이다. 그날 퇴근하고 귀가하는 나의 가슴은 하늘을 날듯이 부풀어올랐다.

《장백산》은 나의 작가의 꿈을 실현시켜주었다.

나는 초중시절부터 문학을 사랑했지만 정식으로 작가가 되려는 지망을 확정한 것은 고중에 다닐 때부터였다. 고중을 졸업하는 송별식에서 나는 “10년 후에는 작가의 신분으로 모교에 찾아오련다”는 호언장담까지 했었다. 하지만 대학을 졸업할 때는 ‘조국이 가장 수요하는 곳으로 간다’고 중학교의 교원으로 배치를 받았고 교원이 된 다음에는 ‘당의 교육사업에 충성’하다 보니 20여년이 지나도록 작가의 꿈은 하늘의 별따기마냥 묘연하였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천사 같은 귀인이 홀연 나타나서 우리말 문학의 황무지나 다름없던 통화지구에 조선족문학연구소조를 묶어세우고 《장백산》 편집부를 설립하면서 고맙게도 나를 문학잡지의 편집으로 불러주었고 편제가 해결되자 나를 잡지사로 전근시켜주었다. 뿐만 아니라 10년도 되지 않는 짧은 시간에 나를 편집으로, 작가로, 편심으로 키워주었다. 나는 남영전 사장의 추천으로 《장백산》의 편집과 부주필을 력임하였고 길림성 우수편집 1등상과 중국당대소수민족문학연구‘원예가상’ 등 편집상을 수차 수상하였다. 나는 또 남영전 사장의 추천으로 선후하여 연변작가협회의 회원, 길림성작가협회의 회원, 중국소수민족작가학회의 회원으로 명실공히 작가대오에 가입하였고 편집이면서 작가의 신분이 되였다. 그리고 나는 남영전 사장의 노력으로 남보다 일찍 부편심과 편심의 직함도 수여받았다.

내가 쓴 장편인물전기 《중한우호의 전기인물 한성호》가 2006년부터 1년 간 《길림신문》에 련재되였고 2007년에 흑룡강조선민족출판사에서 출판하였다. 비록 나의 저작이라고는 하지만 기실 이 작품은 기획으로부터 취재와 련재와 출판에 이르기까지 전반 과정은 남영전 사장의 로고와 갈라놓을 수 없다.

2006년 3월, 당시 남영전 사장은 길림신문사의 사장과 총편집까지 겸임하고 있었다. 어느 날 남사장은 장아문张雅文이 쓴 장편인물전기 《한국 대통령의 중국 ‘어의’》와 모회영毛会迎이 쓴 장편인물전기 《한국을 감동시킨 중국인-한성호》라는 한어문으로 된 두툼한 책 두권을 나에게 넘겨주면서 《길림신문》에 련재할 수 있겠는가 심열하라고 하였다. 나는 며칠 새에 통독하고 나서 한성호의 사적만은 아주 훌륭하니 신문에 련재하면 좋겠지만 그대로 번역해서 련재할 수는 없고 반드시 새로 써야 하겠다고 실토하였다. 그러자 남사장은 “그럼 김선생님이 수고해주시오” 한다. 나는 잠시 주저하다가 신문사에는 젊고 글재간도 좋은 분들이 많으니 다른 분에게 맡기라고 사양했지만 남사장은 두말 않고 임무를 나에게 떠맡겼다. 며칠 후에 나는 남사장과 함께 한성호를 취재하러 한국의 서울로 날아갔다. 남사장이 동행하여 직접 신문사의 의향을 설명하고 서로의 합작을 협상하였기에 한성호 박사는 흔쾌히 우리의 취재를 수락하였고 내가 남아서 보름 동안 취재하는 데 주동적으로 많은 도움을 주었다. 한어와 한국어를 능숙하게 구사하는 그의 구술은 청산류수였고 내가 넘겨받은 각종 서류만 해도 2백만자가 넘었다. 나는 귀국하여 석달 만에 탈고하고 이메일로 한박사에게 원고를 보냈더니 “가장 만족한다”는 찬사가 날아왔다. 《길림신문》에 련재하던 1년 내내 남영전 사장은 각별한 관심을 돌렸고 글의 제목으로부터 내용에 이르기까지 많은 조언을 주었다. 《길림신문》의 련재가 끝날 무렵 남영전 사장은 또 흑룡강조선민족출판사와 련락하여 단행본으로 출판하게 하였고 <일월석의 인생>이란 멋진 머리말까지 써서 책의 품위를 한층 더 높여주었다. 

사람의 일생은 굽이굽이 여러 굽이라고 하지만 정작 한 사람의 운명을 결정하는 관건적인 기회는 그리 많지 않다. 80고개를 훨씬 넘긴 내 인생을 돌이켜보면 그러한 기회가 고작 두세차례에 불과한 것 같다. 그런데 내가 장백산잡지사에 자리를 옮겨와 20여년이나 남영전 사장이란 큰 나무그늘 아래에서 민족문화사업을 위하여 자신의 일체를 이바지하여 열심히 일할 수 있었고 또 그 와중에 자신이 부단히 성장할 수 있은 것은 진정 나의 행운이 아닐 수 없다. 때문에 나는 항상 장백산잡지사에 고마움을 금치 못한다. 로후에도 자신이 《장백산》의 일원이였다는 자호감과 행복감으로 항시 가슴이 뿌듯하다. 아울러 남영전 사장을 비롯한 《장백산》의 모든 동인들의 은공을 영영 잊을 수 없다. 

남영전 사장은 내 인생의 은인이자 거울로서 지금도 《장백산》정신으로 중병을 이겨가면서 민족문화와 토템문화에 대한 심입된 탐구를 견지하느라 재직 때만 못지 않게 드바쁜 나날을 보내면서도 짬짬이 나에게 다방면의 유익한 조언과 편달을 보내주고 있다. 그때마다 나는 감동과 고마움을 금할 수 없다.

남영전 사장의 바통을 이어받은 리여천 사장은 《장백산》의 전통을 계승,발전시키느라 로심초사하면서도 이미 인퇴한 나를 추천하여 중국번역협회의 ‘경력번역가资深翻译家’(2014)와 길림일보사의 ‘돌출한 공헌상’(2015) 의 영예를 안겨주어 고맙기 그지없다.

안미영 현임 사장과 몇몇 임원들이 오늘도 《장백산》을 훌륭히 꾸려가고 있는 것을 볼 때마다 대견스럽고 정년퇴직한 우리들에 대한 따뜻한 관심에 심심한 감사를 드린다. 

《장백산》의 무궁한 발전을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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