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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화련재] 27. 토산농중과 초대교장​ (리광인)

潮歌家族 潮歌网 2020-0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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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광인 실화련재 아,나의 중학시절이여


제4부 중학교 발자취


토산농중과 초대교장


1

초중졸업을 몇달 앞둔 어느날 정오, 금방 점심식사를 끝낸 몇몇 학급친구들은 학교운동장에서 거닐다가 한곳에 퍼더앉아 버렸다. 이말저말 하다가 화제는 중학시절도 인젠 얼마남지 않았다는데로 모아졌다. 시간이 정말 빠르다는 둥, 중학시절이 끝나지 말았으면 좋겠다는 둥, 먼 후날 돌아보면 지금의 중학교 시절이 그리울거라는 둥 하면서 중학시절의 정취에 와르르 젖어 들었다. 


“너희들은 중학교 졸업하면 뭘 하고싶어?”

“뭐 할게 있어. 땅파기밖에 더 있나.”

“그래 고향에서 농사를 짓게 됐지 !”

나의 물음에 심드렁하게 대답하는 화흥 출신의 박춘복의 말, 그에 수긍하는 사촌 동생 박춘희. 우린 대화의 창을 열며 지절거리였다.

“그래서 우리 토산중학교 전신이 토산농중이였나 봐. 뭔가 앞을 내다보며 세운 학교라는 것이 알려지는구나.”

“농중이라는 말은 나도 들어 보았다.”

“농중의 초대교장이 누군지 알아?”

“모르지.”

“최룡길선생이란다. 바로 우리 학급 최숙의 아버지지! 셋째형 리광오가 알려 주었어!”

“그렇구나 !”

“셋째 형은 우리 1학년 시절 3학년 졸업반으로서 일찍 최룡길 교장의 사랑을 많이 받았대!”


중학시절에 푹 젖은 우리들 이야기는 우리 앞선 시절의 토산농업중학교로 넘어오며 무척 흥미로왔다. 허나 시골의 한낮 소년에 불과한 우리들은 토산농중이라고 하는 토산농업중학교의 유래와 발자취를 알리가 만무했다. 그로부터 50년 세월이 흐르면서 요즘 다시 그리운 모교ㅡ토산중학교에 다시 완전 빠지면서 모교의 발자취ㅡ토산농중과 초대교장 부분을 나름대로 추적하여 보았다. 


모교의 발자취에 결정적 단서를 내놓은 이는 50년 전 중학졸업반 시절 전선주파기 때 우리 또래 말밥에 오른 형 리광오였다. 앞의 두 담임선생님에서도 외워 보았지만 2020년 1월 11일 통화에서 셋째 형은 토산중학교 전신은 토산농업중학교이고, 농업중학교의 출현은 1962년 이전으로 거스른다고 알리였다. 그 시절 초창기로부터 교장은 최룡길선생이고, 교도주임은 리금록선생이라는 셋째 형이 고맙기만 하다.


인터넷으로 중문 바이두와 네이버를 검색하니 토산중학교 시작은 1958년이라고 밝혀져 있었다. 사실 그러한지는 자신이 서지 않는다. 이어 2020년 1월 12일 오후 초중동창생 최숙과 먼거리 통화를 가지니 최숙은 1957년이 아니면 1958년이라고 찍어 말한다. 내가 네이버 검색결과를 알리면서 1958년이라고 적혀있다고 하니 그럼 1958년이 옳겠다고 긍정조로 나온다. 


화룡현 토산농업중학교 초대 교장 최룡길선생 부부 (최숙 제공)


2

오랜 세월속에서도 알지 못하던 토산중학교 설립은 이같이 1958년으로 쭈욱 이어져갔다. 최숙동창은 아버지가 초대 교장 최룡길선생인데서 토산중학교의 력사를 손금보듯 환히 꿰고 있었다. 나는 그의 비상한 기억력에 련신 탄복을 금치 못하였다. 최숙은 토산중학교는 아버지의 피땀으로 일어선 학교이고, 우리 가족의 희노애락이 그대로 묻어나는 학교여서 모두를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면서 아버지 최룡길선생 이야기부터 털어 놓았다. 


최숙씨 이야기에 따르면 최룡길선생은 1931년 9월 14일 생으로서 아버지 고향은 아리숭하다고 한다. 최룡길선생은 소학교 시절을 할아버지가 계시는 송하평 아래 화룡현 부흥에서 보내다가 룡정중학교를 다니였다. 룡정중학교 졸업학년 시절 최선생은 17세의 소년이고, 경제상 등 원인으로 중학교도 채 졸업하지 못한 채 화룡현 숭선향 옥석소학교 교원사업에 투신하였다. 옥석을 우리 말로 옥돌골이라고 한다. 모진 두메산골이라지만 지금은 화룡에서 숭선으로 통하는 새 세멘트길이 옥석골로 빠진다.


최룡길선생의 옥석 시절은 1948년으로 알려진다. 옥석소학교 교원시절 선생은 로임도 받지 못하고 대신 쌀을 얼마씩 받으셨다. 그런 옥석소학교에서 한 1년 정도 보내다가 선생은 그 시절 화룡진 부근의 천수소학교로 전근하게 되였다. 천수는 최숙의 어머니 김명숙의 고향이고, 천수에서 최룡길선생은 동네 처녀 김명숙을 만나 결혼하면서 점차 슬하에 아들딸로 6남매를 두었다. 


자녀 6남매중 아들이 넷이고 딸 둘이니 맏이 최덕선이 1950년 생 일 때 동창친구 최숙씨는 1953년 생. 그 아래로 줄레줄레 남녀동생 넷. 최숙씨는 아버지가 다시 화룡 동쪽아래 20리 밖 토산중심소학교로 전근한후 자기가 태여났으니 토산촌 태생이고 출생지는 토산촌 3대의 어느 세집 고방이란다. 토산 3대면 나 청소년 시절의 꿈이 어린 토산 9대 바로 도랑건너 길서쪽 동네였다. 


최룡길선생께서 토산중심소학교에서 교편을 잡은 그때 그 시절은 1945년 8월의 연변해방 이후 10년 철을 잡아보지만 중소학교 전일제교육이 보급되지 못하던 시절로 헤아려진다. 중학교 구역인 화룡1중으로 가자면 소학교 졸업시험을 치러야 하는데, 그나마 경쟁력이 심하여 토산중심소학교 2개반 근 100명 가운데서 몇몇이 가지 못한다. 나머지 거의 대부분 학생들은 어린 나이에도 별수없이 집으로 돌아가 농사를 지어야 했다. 


셋째 형 리광오의 전화통화에 따르면 토산중심소학교 시절 최룡길선생은 중심소학교 교장이였다고 한다. 그러면서도 토산촌 아버지 세대에서 으뜸가는 지식인으로 받들리던 나의 아버지는 10여살 후배인 최룡길선생과 나이격차에도 무척 가까이 보내는 사이였다. 최룡길선생은 마을의 유지인사들인 아버지 리돈재 등과 토산중심소학교 거의 모든 아이들이 중학교에도 가지 못하는 현실을 통탄하였다. 


“이래선 안되지요. 앞길이 창창한 아이들을 이대로 내버려 둘수 없습니다.”

“옳은 얘기요. 방법을 대 보시우!”

최룡길선생의 안타까움에 아버지 리돈재 등 유지인사들은 너도나도 등을 밀어주었다. 이에 힘입어 최룡길선생은 주동적으로 화룡현 교육국에 서면 청시보고를 올리였다. 토산향에다 토산농업중학교를 두어 중학교교육을 받지 못하는 모든 학생들에게 교육의 기회를 열어 주자는 건설적 청시보고. 이 보고는 즉시 현교육국을 통해 현위에 알려지고 자치주 교육부문에도 알려졌다. 

초대교장 최룡길선생 부부 참군하는 막내 아들과 함께 (최숙 제공)


3

드디어 1958년 9월, 반공반독형 화룡현 토산농업중학교가 고고성을 터치면서 전일제 중학교로 가지 못하는 소학교 졸업생들에게 중학교육의 앞길이 환히 열리였다. 아버지 리돈재와 마을의 유지인사들이 최룡길선생을 찾아 두손을 굳게 잡으며 축하를 드리였다. 그런데 현에서는 토산촌의 번뜻한 곳에 농중교사를 짓자는 최룡길선생의 의견에 반대의사를 내놓으면서 반공반독의 농중이니 환히 보이지 않는 골안 쯤으로 잡는것이 좋겠단다. 


그렇게 시초의 화룡현 토산농업중학교 교사는 토산촌에서 북으로 몇리 떨어진 오명 쪽을 선택하게 되였다. 그나마 중학교교사도 없어서 해방전 일본놈들 삼화회사의 옛 병원건물을 그대로 교사로 리용하였다. 어둡고 으스스한 옛 건물이지만 먼저 현상을 유지하여야 했다. 하지만 교사현실을 마냥 그대로 이어간다는건 말도 안되였다. 


최룡길선생은 학교 사생들을 이끌어 새교사 짓기공정을 벌리였다. 그에 앞서 최룡길선생은 집을 토산 3대의 세집에서 새교사터 앞 도랑건너에 왼딴집을 지어들며 전력으로 새교사 짓기공정을 다그치였다.


문화대혁명 직전 1965년에 이르러 토산농업중학교 새교사가 신축되면서 학생수가 급속히 늘어났다. 초생은 토산향 범위를 넘어 전현 범위로 확대되면서 원래의 초중부로부터 고중부를 가진 완전농업중학교로 탈바꿈하였다. 토산농업중학교는 일약 문화대혁명전 길림성의 한폭의 기발로 떠오르면서 그 경험이 연변내는 물론 길림성내로 널리 퍼지였다. 그 시절 농업중학교 교장은 의연히 최룡길선생이고 교도주임은 리금록선생. 


1966년에 중화대지에는 문화대혁명의 거센 강풍이 불어졌다. 연변도,화룡도 례외가 아니다. 화룡현 토산농업중학교의 정상적인 교학질서는 뒤죽박죽이고 최룡길선생은 학교의 이른바 “혁명반란파” 사생들에 의해 비판, 투쟁을 받기 시작하였다. 하루는 이들 “혁명반란파”들이 최룡길교장을 책상우에 올려 놓은 걸상우에 세우고, 목에다는 가는 쇠줄에 건 소흑판을 달아맸다. 


“최룡길을 타도하자!”는 구호소리가 전교를 들썽이며 울려 퍼지였다. 이 구호소리를 들은 한패의 초중 남학생들이 비판투쟁 교실로 달려가 “혁명반란파”들이란 그들 무리를 제압하고 최룡길선생을 구출해 내였다. 이런 현상은 한두번이 아니였다. 또 그때는 고중부 학생들이 시골의 중학교에서 무엇을 배울게 있는가며 현성으로 돌아간 뒤였다. 


2019년 6월 26일, 고향친구들 연길 모아산 모임에서의 최숙동창(우3)



4

그 나날 최룡길선생은 1958년부터 도진 엄중한 질환으로 조용히 북경으로 가서 치료를 받으려 하였다. 그 소식을 알게 된 토산농업중학교의 “혁명반란파”들은 북경에 가서 최룡길선생을 끌고와서 비판투쟁을 멈추지 않았다. 교도주임 리금록 등 선생들도 “혁명반란파”의 손아귀를 벗어나지 못하고 모진 시달림을 당하였다고 한다. 죽지 못해 살아간 그 험악한 세월, 그자들이 최룡길선생의 목에 세가닥 가는 쇠줄로 소흑판을 걸어놓으니 그 세가닥 가는 쇠줄이 살을 파고들며 말이 아니였다. 


1970년에 문화대혁명의 거센 강풍이 지나가면서 이해 4~5월 경에 최룡길선생은 정책시달로 해방의 희열을 받아 안았다. 때는 이미 토산공사 명산대대에 집을 잡고 소대탄광에서 탄광일을 하고있을 때였다. 화룡현 교육국에서는 원래의 토산농업중학교로부터 발전한 전일제 토산중학교로 복직하라고 하지만 최룡길선생은 응하지 않았다. 결국 최룡길선생은 화룡현내 상화중학교로 갔다가 석달만에 현내 투도중학교, 즉 투도광중 교도주임으로 배치를 받았다. 


1981년에 최룡길선생은 퇴직해를 맞이하였다. 최숙씨 셋째 남동생이아버지 대신으로 취직한뒤 투도공사에서 최룡길선생을 공사교육보도소 소장으로 배치하였다. 한데서 선생의 정식 정년퇴직은 1985년으로 알려진다. 선생의 부인 김명숙씨는 문화혁명에서 시달린 남편의 뒤시중을 할라, 자식 6명을 키울라 그 고생 이만저만이 아니였다. 


최룡길선생은 선생대로 농업중학교 일로 물불을 가리지 않으면서, 6남매를 키우면서도 6남매 모두를 언제 한번 기쁘게 안아 줄 겨를도 가지지 못하였다. 6남매들이 선후로 아버지 무릎에 앉아 본다는건 바랄수도 없는 일이였다. 그러던 최룡길선생은 1979년생 외손자ㅡ딸애 최숙의 아들을 무릎에 앉히며 고와해주니 정녕 꿈만 같다.


동창 최숙씨는 토산중학교를 졸업한후 아버지 최룡길 일로 네가지 지향에 추천되지 못하고 집을 따라 토산공사 명산6대로 가서 6년을 보내였다. 그후 부모님 따라 투도공사로 가면서 투도 복장공장에 취직하였다가 투도공소사로 전근하게 되였다. 물론 이는 전화취재 가운데서 알게 된 사실이고 1970년 12월 중학교를 졸업한후 소식은 모르고있었다.


최숙씨 소식을 알게 되고 고향친구들 연길모임에서 만난건 2018년 봄이후. 금방 2020년 1월 12일 오후 전화통화에서 최숙씨 아버지 최룡길교장의 인생발자취를 추적하면서 지금껏 잘 모르고 지내왔던 토산중학교 전신ㅡ토산농업중학교의 전후관계를 자상히 알게 되였으니 얼마나 마음이 후련한지 모르겠다. 모교의 발자취ㅡ토산농업중학교와 초대교장 최룡길선생 발자취는 개략적이나마 밝혀지기 시작하였다.  (계속)


차례(지난 기사는 클릭해 볼수 있습니다)

1부 어엿한 중학생 중학교 시절 첫 시련/뢰봉ㅡ빛나는 본보기/또 하나의 영웅인물 구양해/그는 리과 나는 문과/작문 그리고 시쓰기/만인갱 참관과 창규친구 

2부 우리 전주 리씨 중학교졸업반시절/아버지와 우리 전주 리씨/명암촌과의인연/내고향 모래언덕/셋째삼촌 리상재렬사/가난과 동무하다1/가난과 동무하다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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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부 중학교 발자취 양금월 찾아 100여리1/양금월 찾아 100여리2/송병천 교장1/송병천교장2/두 담임선생님/토산농중과 초대교장/셋째 형 리광오1/셋째형 리광오2

제5부 네가지 지향 전일제 첫 중학생/1970년 시절 특수군체/네가지 지향 양보하고/우리 반장 경철이/나의 소꼽 친구들/ 그날의 그 사인들1/그날의 그 사인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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