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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술56] 서울-평양-북경 국제선에 올라​ (김학철 편5)

潮歌网 2020-09-15

The following article is from 朝闻今日 Author 길림신문

 길림신문  대형구술시리즈  '문화를 말하다' 56 

 김학철 편 5 

서울-평양-북경 국제선에 올라



일제통치하에서 피로써 쟁취한 광복의 서울, 김학철의 서울에서의 새 생활이 시작됩니다. 서울에서의 좌익 사회주의단체가 활동한 자리는 지금의 서울 파고다공원 서쪽 종로2가에 있습니다. 


그리고 김학철은 좌익정치활동을 하는 동시에 작품활동을 시작하였습니다. 12월 1일 처녀작 단편소설 〈지네〉를 《건설주보》에 발표합니다. 당시 서울에서 발표된 〈균렬〉, 〈아아 호가장〉, 〈담배국〉 등 10여편의 소설들은 항일전쟁시기 전우들의 영웅적 항전모습을 기록한 작품들입니다. 항일전쟁시기에도 최전선에서 틈을 타 글을 썼는데 그 중에서 대표작으로는 〈조선의용대추도가〉가 있습니다. 그리고 연극 씨나리오도 썼으나 애석하게도 지금 남아 있는 연극대본은 없습니다.


서울에서 '김학철소설창작평의회'를 마치고 작가들과 기념사진을 남긴 김학철(앞줄 오른쪽 세번째).


서울에서 김학철의 소설창작을 두고 당시 좌익 대표 작가들이 모여서 '김학철소설평의회'를 가졌습니다. 김남준과 같은 당시 유명한 작가들이 대거 참석하였지요. 그때 함께 찍은 사진이 용케 살아 남았는데 사진 뒤 면에는 참석인 이름들이 적혀 있습니다. 참으로 소중한 사진이지요.


서울에서의 공개 활동이 약 2년이 지나자 사회주의좌익운동에 대한 탄압이 시작되였어요. 다른 분들은 지하활동으로 투쟁을 이어갔으나 김학철은 다리 하나가 없으니 표적이 너무 선명했지요. 그래서 조직에서는 김학철이더러 평양으로 월북하도록 결정하였습니다.


김학철은 서울을 떠날 때 나이가 몇살 우인 삼촌한테 자신의 물건들을 맡기며 멀지 않아 다시 돌아올 것이니 잘 보관해 달라고 부탁했어요. 그런데 좌익에 대한 탄압이 더욱 격심해지자 삼촌은 사진 등 김학철의 물품들을 유지(油纸)에 싸서 땅에 파묻었습니다. 그리고 몇해 지나서 그것들을 다시 파 보니 그 사진 가장자리가 부식되여 지금의 사진 모양이 되였습니다. 그래도  그 험한 세월을 이기고 천신만고 끝에 사진이 남아 있다는 것 만으로도 너무 다행이지요.


닳아떨어진 책두껑을 새로 만든 《고요한 돈》.


그 사진 외에 서울시기의 유품 하나가 더 남아 있는 것이 있어요. 그것은 김학철이 서울에서 평양으로, 평양에서 북경으로, 북경에서 다시 연길로 유일하게 휴대한 물품인데 바로 쏘련 작가 숄로호브의 소설 《고요한 돈》(일본어판)이였어요. 모든 소지품을 다 버려도 숄로호브의 이《고요한 돈》만은 소중히‘모시고’수천리 길을 에돌아 온 것입니다. 김학철의 《고요한 돈》에 대한 사랑은 그의 문학에 대한 사랑을 어느 정도 가늠해 볼 수 있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1947년 조선 평양에서 결혼하고 행복한 생활을 시작한 김학철 김혜원 부부. 


1947년 김학철은 평양에서 김혜원과 결혼하고 어머니와 누이동생 함께 짧으나마 행복한 생활을 시작하였습니다. 김학철과 김혜원이 만난 것은 지금의 서울대병원이였습니다. 김혜원이 병원에서 간호장으로 근무할 때 김학철은 이곳에 입원을 하게 되고 김학철이 평양으로 월북할 때 김혜원은 부모형제를 두고 김학철을 따라 나선 것이였지요.


평양에서의 결혼식은 김두봉선생이 주례를 서 주셨습니다. 중앙군관학교 시절의 사제간이 평양에서 다시 만난 것이였지요. 김두봉선생은 김학철에게 맑스주의를 전수해 준 계몽스승이십니다. 그는 옛 제자의 결혼선물로 은수저 두 쌍을 주셨는데 그 중 작은 숟가락은 제가 어릴 때 갖고 놀다가 잃어 버리고 나머지는 지금도 소중히 보관하고 있습니다.


평양에서 김학철은  《로동신문 》 론설기자로 일하면서 작품창작을 하였지요. 그때 옛 전우 정률성과도 재회하고 함께 창작활동을 했었어요. 정률성과 부인 정설송(丁雪松)은 딸 정소제(郑小提)를 데리고 자주 저의 집에 놀러 왔지요. 정소제는 저보다 몇살 우인 누나였습니다. 김학철은 정률성과 남경 화로강(花露岗) 시절 함께 생사를 가르는 반일테로활동을 했던 사이입니다.


평양에서 다시 만난 정률성 가족.


화로강은 의렬단의 중요한 아지트였는데 그 때 최채도 그 곳에 함께 있었습니다. 정률성은 그후 연안에서 부인 정설송과 결혼하고 평양으로 가게 되였는데 평양에서 김학철과 다시 만난 것이지요. 김학철 작사 정률성 작곡으로 여러 작품들이 창작되였습니다. 그 중에서 음악서사시〈동해의 어부〉와 〈유격대전가〉가 인기가 있었습니다.


몇십년 후 1986년 연길에서 정률성기념음악회를 할 때도 〈동해의 어부〉가 공연되였습니다. 정률성이 북경에서 뇌출혈로 돌아가셨을 때 김학철은 감옥에 갇혀 있었는데 소식을 듣고 비통을 금할 수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저더러 당시 정설송(아줌마)께 위문을 전해 달라고 부탁을 해왔지요.


평양에서의 김학철의 주요작품으로는 단편소설 〈정치범 919〉, 〈선거만세〉, 〈꼼뮨의 아들〉 등과 중편소설 〈범람〉이 있었습니다. 중편소설은 조선문학예술총동맹기관지 《문학예술》에 발표되였습니다.


김학철은 1950년 10월에 압록강을 건너 북경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부상당한 다리를 끌고 일본헌병에게 압송되여 가는데 북경시민들이 경의로운 눈빛으로 바래주던 북경역으로 다시 들어서게 됩니다. 조선의용대 전우 서휘(徐辉)의 소개로 김학철은 정령(丁玲)의 중앙문학연구소 연구원으로 일하게 되였지요. 서휘는 팽덕회와 교분이 깊고 또 정령과도 잘 아는 사이였습니다.


모처럼 연변의 김학철 댁을 찾은 중국의 대문호 정령(앞줄 왼쪽 세번째). 


정령은 그 당시 중국 문학계의 핵심 인물 중 한 분이였습니다. 그는 해방 후 장편소설 《태양은 상건하를 비춘다》를 써서 사회주의계렬에서 최고의 문학상인 쏘련 쓰딸린문학상을 받았지요. 정령의 문학활동은 상해에서의 로신의 전우시절부터 시작하여 연안에서의 활동을 이야기할 수 있는데 모택동 주석이 작가에게 그것도 녀류작가에게 시를 써 준 것은 정령 한사람 뿐입니다. 모택동은 정령을 문무를 겸비한 녀장군이라고 일컬었지요.


정령은 김학철의 경력과 성격을 아주 좋아했어요. 당시 북경 이화원(颐和园)은 지금처럼 개방된 공원이 아니였습니다. 이화원의 일부를 중앙휴양소로 사용했는데 이화원 중심부의 집 두채가 정령의 문학연구소에 분배되였지요. 정령은 그 중 앞채를 그들 부부가 사용하고 바로 잇닿은 뒤채를 김학철네 세식구가 들게 하였습니다. 그로써 김학철은 정령부부와 3년 동안 이웃으로 이화원에서 함께 지내게 되였어요.


북경 이화원에서.


정령의 집에는 일주일에 한두번씩 중국 지식계의 유명 인사들이 모였습니다. 당시 중국의 대표시인 애청(艾青),권위 철학가 애사기(艾思奇) 등 최고의 작가, 리론가들이 모였는데 그 때면 정령은 김학철을 불러 함께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하여 김학철은 중국 최고의 지성인들과 교분을 맺게 되였고 그들과의 친분을 평생 유지했지요.


시인 애청은 특히 우리 조선의용대와 인연이 깊었습니다. 조선의용대 전사들이 희생 되였을 때 애청은 지금도 전해지는 유명한 시를 써서 전사자들을 추모했어요. 애청은 일본 감옥에서 풀려나 온 조선의용대원 김학철을 당연히 좋아하게 되였고 그 인연은 마지막까지 변함이 없었습니다.


정령은 문화대혁명 후 김학철에게 쓴 편지에서 “우리가 북대황의 황야와 진성감옥에서 힘든 세월을 이겨낼 수 있은 것은 김학철은 일본감옥에서도 외다리로 견디어 냈는데 우리가 감당하지 못할 리유가 무엇인가 하는 각오를 가졌기 때문이였다.”고 썼습니다.


그리고 또 언젠가 일부러 연변의 김학철의 집을 찾아오셨을 때 제가 정령(큰엄마로 불렀음)의 신끈을 매여드렸어요. 그랬더니 정령은 “네가 어릴 때 너의 신끈을 내가 매여주었는데 지금은 네가 나의 신끈을 매여주고 있으니 정말 세월이 많이 바뀌였구나!” 라고 하셨습니다.


북경에서 한문으로 여러번 재판되였던 작품 《범람》과 《군공메달》.


당시 북경에서 김학철의 작품 《군공메달》(军功章) 과 《범람》(泛滥) 두 권이 한어로 출판 되였습니다. 그 책들은 엄청나게 잘 팔려 일곱번이나 재판을 할 정도였지요.


그 무렵 주덕해 주장이 연변에서 문련을 창설하면서 북경의 김학철을 초대(初代) 책임자로 초청하였습니다. 하여 김학철은 북경의 호화로운 생활을 뒤로 하고 연변으로 오게 됩니다.


주덕해와 김학철의 인연을 살펴보면 또 재미있는 부분이 있습니다. 주덕해가 원래 흑룡강 밀산에서 항일빨지산활동을 할 때 왕련이라는 절친한 전우가 있었어요.


두 사람은 후날 조직의 파견으로 모스크바에 군사류학을 가게 되는데 주덕해는 륙군을 배우고 왕련은 공군군사학원을 다녔습니다. 졸업 후 두 분은 함께 연안으로 가게 되였습니다. 왕련은 연안의 첫 인민비행장을 설계하고 중국 인민공군 창립에도 기여를 하였지요. 중국 해방군 공군력사에도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이화원 옛집을 돌아보고 있는 김학철.


주덕해는 조선의용군 일부를 인솔하여 할빈에 들어가 사업하다가 다시 연변으로 진출하고 연변의 첫 자치주 주장이 되였습니다.왕련은 광복 후 조선에서 조선공군을 창설하고 첫 공군사령원이 되였습니다. 왕련이가 하루는 평양의 김학철 집에 놀러 왔다가 김학철의 누이동생을 보고 반하였습니다.


“어, 학철동무, 자네 누이동생이 대단한 미인이네요. 나한테 줘요.”라고 말을 떼면서 왕련이는 김학철의 매부가 되였습니다.


왕련은 조선공군사령원으로 후날 연길비행장 시찰을 오면서 장모님 즉 저의 할머니를 모시고 왔다 가기도 하였지요. 


그리고 왕련은 연변에 오면 당연히 옛 친구인 주덕해와 만나군 하면서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게 되였지요. 그러다 보니 주덕해는 북경에서 창작활동을 활발하게 하고 있는 김학철이 전우 왕련의 처남이라는 것을 알게 되였고 김학철을 연변문련 창설 책임자로 초청하게 되였던 것입니다.


하여 김학철은 1952년 10월 가족을 데리고 연변으로 오게 되고 연변에서 창작활동을 시작합니다.

- 다음기 계속 -


글 구성: 김청수/영상: 김성걸, 안상근, 김파/제작: 김파


 길림신문  대형구술시리즈  '문화를 말하다' 

 김학철 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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